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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독립 50주년

09Dec/11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양철준


   12월 9일은 탄자니아(본토였던 탕가뉘카)가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지 50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독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탄자니아인들은 분쟁과 정치적 격변 없이 평화적인 독립 국가를 유지해왔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독립 직후 120개가 넘는 종족들을 통합하여 탄자니아인이라는 국민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생국가 탄자니아의 절박한 문제였다. 종족성, 사회적 계급, 종교적 차별이 없는 사회를 건설해가겠다는 집단 의지가 충만한 시기도 존재했고, 이러한 의지와 실천이 탄자니아가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할 수 있는 힘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탄자니아식 사회주의인 우자마(Ujamaa)를 도입하여 새로운 사회를 위한 정치, 경제, 철학적 기반으로 삼아 국민들이 가난, 무지,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현실과 유리된 정책 및 국민들의 자발적 동의 부재, 우자마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우자마가 결과적으로 탄자니아 경제를 파탄시켰고 다수의 국민들을 오히려 빈곤하게 만들었다는 비판과 분석도 제기되었으나, 우자마 시기 탄자니아가 교육과 의료 등 공적인 영역에서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종족과 종교적 차이를 넘어 관용과 평화의 시기를 구현했다는 점은 과소평가될 수 없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우자마 시기가 종식되면서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신자유주의가 사회의 지배적 질서와 가치로 뿌리내리고 내면화되면서 급격한 변화가 유발되었다. 외국인 직접투자의 증가, 높은 경제 성장률과 같은 긍정적 측면에서의 변화가 부각되지만 이에 수반되는 사회문제들도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종족, 지역, 종교의 정치적 도구화,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빈부격차, 공교육의 질적 수준 저하, 부패의 만연 등이 대표적인 문제들로 언급된다.

   높은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성장의 효과가 일반 대중들에게 골고루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의 생활에서 기본적인 의식주, 의료 서비스, 공교육, 상하수도 및 전기를 비롯한 사회기반시설은 답보 상태에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지도자들은 공익보다는 사익추구 집단이 되어 다수 대중들로부터 공분의 대상이 된 상황에서 애국심을 역설한다. 정치지도자들이 말하는 애국심이라는 것이 국민들에게는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이 사적 이익 추구가 아닌 공익의 실현을 위해 도덕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때, 비로소 애국심이 형성된다는 점은 국민들은 지적한다. “나라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할 때 그 사람은 그 나라를 오롯이 사랑한다.” 변화의 시기를 살아가는 탄자니아 보통 사람의 이 말을 정치지도자들은 성찰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을 통해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출처: Mwananchi (www.mwananchi.co.tz)


무상초등교육의 목표와 당면 문제들: 탄자니아의 상황

20Oct/11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양철준


   탄자니아는 교육과 의료 등 공적 서비스의 균등한 제공과 분배라는 문제에서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룬 국가로 평가되어 왔다. 공적인 영역에서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려는 탄자니아의 정책과 이러한 정책의 이행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모범적 사례로 제시된다.

   독립 직후인 1961년부터 1967년까지는 초등교육보다는 국가 건설과 발전에 주축이 될 수 있는 고급 인력을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이상과 부합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 있어, 초등교육이 중요한 토대를 형성하며 모든 교육의 근간이 됨을 인식한 니에레레 대통령은 초등교육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정책적으로도 우선순위를 두었다. 특히 탄자니아식 사회주의를 대내외적으로 공표한 ‘아루샤 선언’이 행해졌던 1967년과 5개년 국가계발계획(1969-1974)을 기점으로 괄목할만한 변화가 실현되었다. 1970년에는 학생들의 총등록률(GERs)이 39.1퍼센트에 불과했지만, 1980년에는 98퍼센트로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교육의 기회 제공에 있어서도 성, 지역, 종교적 차별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한 적도 없었다.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1977년부터는 보편적 초등교육(UPE)을 실시했으며, ‘자립을 위한 교육’을 기치로 내걸고 교육부문에 있어서 정부가 적극적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에 경제적 위기에 봉착했음에도 불구하고 80년대 후반까지는 보편적 초등교육에 대한 정책의 기본적 기조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탄자니아도 자유 시장 경제체제를 도입했고, 공적인 부문에서 국가의 통제와 역할 약화로 특징지어지는 경제 회복 프로그램(1989년-1993년)이 실행되면서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우선 교육 비용의 제공 주체가 정부에서 학부모로 전가됨으로써 교육을 통한 사회적 불평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교육도 비용 대비 효율성의 척도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민간부문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다.

   1999년부터 무상초등교육(FPE)을 실시해 왔고, 새천년개발계획(MDGs)과 ‘비전 2025’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서 교육 부문에 대한 중요성 인식과 투자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원대한 정책 발표에도 불구하고 교육 환경의 향상은 완보 상태에 있어 교육, 특히 공교육의 질적 수준 저하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목표는 설정되었지만 이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예산, 시설, 교사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해 교육의 질적 저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책상과 걸상이 없어 바닥이나 나무 아래에 앉아 수업을 받을 정도로 열악한 교육 환경이다. 특히 장애 아동과 여학생들은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약자들이다. 교육 정책에서 모든 학생들이 책상과 걸상을 갖춘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는 권리를 명문화하고 있지만, 정작 교육 현장에서는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일정 교육을 마치고도 읽고 쓸 수 있는 기본적 능력조차 없는 학생들이 양산되는 것은 물론 학생들에게는 심리적 위축과 위계가 내면화되는 결과도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지역구에 책걸상을 기증하거나 라이온스 클럽을 비롯한 민간단체 및 비정부기구들이 정부가 제대로 못하는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 혹은 이미지 만들기의 도구로서 책걸상을 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고 ,정부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의무이며 국민의 기본적 권리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요컨대, 교육받을 기회의 제공과 환경의 조성은 시혜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이며, 이러한 문제에 소홀한 정부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www.mtanzania.co.tz, www.ippmedia.com, www.elimubora.com


‘음왈리무 니에레레(Mwalimu Nyerere)’ 서거 12주년

18Oct/11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양철준


   1922년 4월 11일 탄자니아 북부 빅토리아호에 인접한 마라州 무소마지방의 부티아마에서 출생한 줄리어스 캄바라게 니에레레(Julius Kambarage Nyerere)가 1999년 10월 14일 77세의 일기로 런던에서 백혈병으로 서거한 지 12주년이 지났다.

   니에레레는 탕가뉘카의 독립을 이끌었으며, 탕가뉘카의 초대 수상과 탄자니아의 대통령을 역임했다가 1985년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났으며, 지금도 ‘국부(Baba wa Taifa)’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재임 중 본토인 탕가뉘카와 잔지바르의 연합공화국을 출범시켰으며, 수많은 종족으로 구성된 탄자니아인들이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갖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종족, 인종, 종교 등의 경계를 넘어 응집력을 지닌 민족정체성을 만들어내려는 그의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되었다. 우선, 스와힐리어를 국어로 선포하여 초종족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언어를 통해 국민들을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통합된 민족정체성의 형성을 위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탄자니아는 종족적 분쟁을 겪지 않고 정치적 안정을 지속시켜왔다.

   대외적으로는 아프리카대륙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한 범아주의자였으며 비동맹운동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특히 남아공화국 백인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 짐바브웨의 소수 백인 정권에는 강고하게 맞섰다. 그리고 모잠비크, 앙골라, 기네비소, 나미비아 등 남부 아프리카의 해방투쟁에 대한 그의 일관된 도덕적 지지와 물질적 지원은 아프리카의 완전한 해방이 없이는 탄자니아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탄자니아가 해방투쟁조직들에 제공한 지원은 인간의 평등과 존엄에 대한 니에레레의 굳은 신념과 범아주의에 대한 이상이 아니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었을 것이다.

   영국에 유학하면서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후 사회주의와 아프리카의 전통적 공동체주의를 접목시키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우자마(Ujamaa)’로 구체화되었다. 현실과 다소 유리된 이상의 실현과 국내외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 전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불리한 환경이 조성되면서, 니에레레는 자신이 추구했던 정책들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며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왔다.

   비록 그가 추구했던 정책들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교육과 의료 등 공적인 부문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2009년 유엔총회에서는 니에레레를 ‘사회정의의 영웅’으로 지명했을 정도로 그는 한평생을 사회정의, 평등의 구현, 빈곤 타파, 지속가능한 개발에 헌신했다.

   고결한 인격,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청렴성을 가진 지도자였던 니에레레의 부패한 세력에 대한 거침없는 그의 비판과 직설은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시장경제체제의 도입과 신자유주의의 확산 과정에서 탄자니아사회도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빈부격차의 심화, 정치적 부패, 종족 및 종교간 갈등과 같은 많은 문제들이 사회적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에레레가 추구했던 이상과 정책들을 재조명, 재평가하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인간을 가장 중심에 두고 그러한 휴머니즘을 구현하고자 했던 니에레레의 철학과 정신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 흔들리는 때에 더욱 강한 울림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출처: Tanzania Daily News (2011년 10월 10일)

Mwananchi (www.mwananchi.co.tz, 2011년 10월 13일)


동아프리카공동체와 스와힐리어: 우간다의 언어 이데올로기

12Oct/11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양철준


   1999년 조인되고 2000년 7월부터 발효된 동아프리카공동체(EAC)는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 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는 지역공동체이다. 발족될 당시에는 동아프리카의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가 주축이 되었지만 2007년에 중부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부룬디도 가입하면서 EAC는 중동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정부간 역내기구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2010년 기준으로 동아프리카공동체 가맹국들의 전체 인구가 1억 3천 3백만인데 언어, 문화, 종족적으로 다양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상이한 식민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정치적, 경제적인 통합과 더불어 가맹국 국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핵심적 가치를 만들어내고 공동체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평적 의사소통이 불가결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언어는 EAC의 핵심적 가치와 목표를 실현하는데 있어 필수적이다.

   식민종주국의 언어를 기준으로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에서는 영어가 공식어/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르완다와 부룬디는 벨기에(제1차세계대전까지는 독일)의 식민통치를 받아 불어가 공식어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는 다수의 종족어들이 공존하고 있어 언어적 다양성이 풍부한 나라들이다. 이에 반해 르완다에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키냐르완다(Kinyarwanda), 부룬디에서는 키룬디(Kirundi)로 소통하는 이른바 준단일언어사회이다. 이와 같은 언어상황에서 스와힐리어는 영어권과 불어권을 넘나들고 종족어와 종족어를 연결해주는 교통어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따라서 EAC의 출범과 역할 강화는 스와힐리어의 지위와 기능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새로이 규정되고 있는 스와힐리어의 위상과 역할에 대하여 우간다에서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내륙이었던 우간다로 교역을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스와힐리인들과 아랍인들이 18세기에 도래하면서 스와힐리어가 우간다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구 선교사들은 이슬람과 동일시되던 스와힐리어 대신 종족어들을 선교활동을 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영국은 부간다 왕국을 지렛대로 삼아 우간다의 다른 종족집단들을 통치함으로써, 최대 종족집단을 이루고 있는 간다인들(Baganda)의 언어(Luganda)가 일정한 테두리 내에서 초종족적 공통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때문에 일찍부터 영어와 루간다가 주요한 언어로 뿌리를 내렸다.

   한편 이디 아민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1971-1979년)에는 스와힐리어를 군대와 경찰의 언어로 사용하도록 고무함으로써 폭압적 군대와 경찰과 스와힐리어가 동일시되는 현상도 빚어냈다.

   그러나 EAC의 출범과 역할의 강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역내의 국가와 종족을 넘나들며 통용되는 스와힐리어를 유효하고 의미 있는 소통 매체로 삼아야한다는 견해들이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요컨대, 역사적, 정치적으로 과정의 결과로서 형성된 언어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언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언어 사용의 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 사용에 대한 합리화와 정당화의 방식으로 외현되는 언어에 관한 믿음(맹신/편견/선입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출처: http://www.graduates.com/Forum


제1단계 1차년도 현지조사(양철준)

10Feb/11
양철준1-1(LL)

양철준 HK연구교수는 2011년 1월 17일부터 2월 2일까지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서 현지조사를 수행했다. ‘Shifting Agency in Shaping Linguistic Landscape’를 연구 주제로 설정하여 변화하는 정치, 경제적 역동성에서 언어 경관 형성 과정에서의 행위 주체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탄자니아는 사회주의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했고, 이 과정에서 언어에 대한 인식, 태도, 이데올로기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맥락에서 ‘언어 경관 형성에 있어서의 행위 주체성의 문제’에 천착하여 다르에스살람의 언어 경관 변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했다. 연구 결과는 일본 교토대학교의 제18차 Kyoto University of African Studies Seminar에서 발표되었고, “Shifting agency in shaping linguistic landscape: Evidence from Dar es Salaam”이란 논문 제목으로『사회언어학』제22권 2호에 게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