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왈리무 니에레레(Mwalimu Nyerere)’ 서거 12주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양철준


   1922년 4월 11일 탄자니아 북부 빅토리아호에 인접한 마라州 무소마지방의 부티아마에서 출생한 줄리어스 캄바라게 니에레레(Julius Kambarage Nyerere)가 1999년 10월 14일 77세의 일기로 런던에서 백혈병으로 서거한 지 12주년이 지났다.

   니에레레는 탕가뉘카의 독립을 이끌었으며, 탕가뉘카의 초대 수상과 탄자니아의 대통령을 역임했다가 1985년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났으며, 지금도 ‘국부(Baba wa Taifa)’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재임 중 본토인 탕가뉘카와 잔지바르의 연합공화국을 출범시켰으며, 수많은 종족으로 구성된 탄자니아인들이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갖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종족, 인종, 종교 등의 경계를 넘어 응집력을 지닌 민족정체성을 만들어내려는 그의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되었다. 우선, 스와힐리어를 국어로 선포하여 초종족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언어를 통해 국민들을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통합된 민족정체성의 형성을 위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탄자니아는 종족적 분쟁을 겪지 않고 정치적 안정을 지속시켜왔다.

   대외적으로는 아프리카대륙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한 범아주의자였으며 비동맹운동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특히 남아공화국 백인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 짐바브웨의 소수 백인 정권에는 강고하게 맞섰다. 그리고 모잠비크, 앙골라, 기네비소, 나미비아 등 남부 아프리카의 해방투쟁에 대한 그의 일관된 도덕적 지지와 물질적 지원은 아프리카의 완전한 해방이 없이는 탄자니아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탄자니아가 해방투쟁조직들에 제공한 지원은 인간의 평등과 존엄에 대한 니에레레의 굳은 신념과 범아주의에 대한 이상이 아니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었을 것이다.

   영국에 유학하면서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후 사회주의와 아프리카의 전통적 공동체주의를 접목시키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우자마(Ujamaa)’로 구체화되었다. 현실과 다소 유리된 이상의 실현과 국내외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 전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불리한 환경이 조성되면서, 니에레레는 자신이 추구했던 정책들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며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왔다.

   비록 그가 추구했던 정책들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교육과 의료 등 공적인 부문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2009년 유엔총회에서는 니에레레를 ‘사회정의의 영웅’으로 지명했을 정도로 그는 한평생을 사회정의, 평등의 구현, 빈곤 타파, 지속가능한 개발에 헌신했다.

   고결한 인격,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청렴성을 가진 지도자였던 니에레레의 부패한 세력에 대한 거침없는 그의 비판과 직설은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시장경제체제의 도입과 신자유주의의 확산 과정에서 탄자니아사회도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빈부격차의 심화, 정치적 부패, 종족 및 종교간 갈등과 같은 많은 문제들이 사회적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에레레가 추구했던 이상과 정책들을 재조명, 재평가하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인간을 가장 중심에 두고 그러한 휴머니즘을 구현하고자 했던 니에레레의 철학과 정신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 흔들리는 때에 더욱 강한 울림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출처: Tanzania Daily News (2011년 10월 10일)

Mwananchi (www.mwananchi.co.tz, 2011년 10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