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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도자 왕가리 마다이를 잃은 아프리카(하)

22Nov/11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 연구교수 박정경


   그녀의 교육 배경과 경력에서 드러나듯이 왕가리 교수는 아프리카의 ‘신흥엘리트’ 계층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아프리카의 수재들은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이제 막 독립한 고국으로 돌아와 정계, 관계, 재계, 학계의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아프리카 신생독립국 운명의 키를 쥐고 있었던 이들 신흥엘리트는 아프리카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다국적기업과 결탁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다. 식민주의자들의 착취가 사라지고 독립 정부가 들어서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 믿었던 아프리카인들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흥엘리트들이 대저택을 짓고 고급차를 굴리는 사이에 절대다수 아프리카인의 삶은 더욱 비참해져 갔다. 왕가리 교수는 부와 권력이 약속된 신흥엘리트의 길을 거부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사회 변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프리카인의 보다 나은 삶을 지향했던 그녀의 소신은 기득권층인 신흥엘리트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왕가리 교수의 활동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왕가리 교수는 그린벨트운동(Green Belt Movement)과 케냐여성전국위원회(National Council of Women of Kenya) 등을 이끌며 환경과 여성 분야에서 케냐 사회의 변화를 주도했다. 특히, 환경 분야에서 그녀의 활동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왕가리 교수는 케냐 중부 고원 지역 마우숲(Mau Forest) 등 삼림지대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프리카의 인구는 최근 몇 십 년간 급격하게 증가했다. 1950년대 3억 명을 밑돌던 아프리카 인구가 지금은 10억 명을 넘어서고 있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곧 환경 파괴를 가져왔다. 아프리카의 삼림이 거주지와 농경지로 잠식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당장 아이들 먹을거리가 필요한 아프리카 빈농의 부모에게 옥수수 심을 농지를 확보하거나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지 말라는 소리는 그냥 굶어 죽으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왕가리 교수는 삼림 파괴가 초래할 재앙을 이들에게 설명하고 녹지화 사업을 통해 이들의 일자리 창출을 모색하기도 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녹지를 기득권층의 탐욕으로부터 지켜내는 데도 왕가리 교수는 결사적이었다. 1990년 당시 대통령이자 집권당 카누(KANU: 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의 당수인 다니엘 아랍 모이(Daniel arap Moi)는 나이로비 중심가에 있는 우후루공원(Uhuru Park)에 집권당사를 건축하려 했다. 왕가리 교수는 뜻을 같이하는 케냐의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온몸으로 우후루공원 개발을 저지했다. 또한, 그녀는 나이로비의 고급 주택지 무타이가(Muthaiga) 근처의 카루라숲(Karura Forest)을 건설업자들의 개발 야욕으로부터 지켜내기도 했다. 왕가리 교수의 녹지 공간 보존에 대한 선견지명이 없었더라면, 지금 나이로비는 난개발의 폐해로 신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극소수의 부유층이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여 불도저 시동을 걸때마다, 왕가리 교수는 다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그 앞을 막아섰다.

   21세기 지구는 기후변화의 위협을 겪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의 사막화는 이미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재앙을 초래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왕가리 교수는 탐욕에 눈이 멀어 예견된 재앙을 방치한 아프리카의 엘리트들과는 다른 길을 걸으며, 진정으로 아프리카 대중의 행복을 꿈꿨던 지도자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에이즈의 진실

19Nov/11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김광수


   아프리카를 생각할 때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단어는 죽음, 기아, 가난, 전쟁, 그리고 에이즈(Human Immunodeficiency Virus : HIV)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땅에서 위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는 서구 미디어의 영향으로 더욱 나쁜 이미지를 주고 있다. 세계 최대 에이즈 감염국으로 분류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에이즈 문제는 무엇일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훨씬 안정적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유아사망률이 20년째 거의 변화가 없으며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는 사실은 유니세프(UNICEF)와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 WHO)가 발행한 “유아사망의 수준과 경향(Levels and Trends in Child Mortality)”을 통해 밝혀졌다.

   케이프타운 대학교 (University of Cape Town : UCT)의 소아과 및 아동 건강 학과의 총장이나 적십자 아동병원(Red Cross Children’s Hospital)의 수장인 자르(Heather Zar)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높은 영아사망률의 주요원인은 모자감염으로 인한 에이즈라고 2011년 9월 20일자 남아프리카공화국 데일리뉴스(Daily news)의 기사를 통해 밝히고 있다. 실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한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에이즈 문제에서 모자감염은 영아사망과 직결되는 심각하고도 중요한 이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에이즈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항레트로바이러스 에이즈 치료(Antiretroviral Treartment : ART)를 에이즈 신생아에게 보급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UN에이즈프로그램(UN Programme on HIV/AIDS : UNAIDS)에서도 새로 발생하는 에이즈 감염의 90%가 아동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음을 밝히고 UNAIDS 사무총장 시디베(Michel Sidibé)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보건부 장관 모트소알레디(Aaron Motsoaledi)를 만나 아동 에이즈 감소를 위한 노력과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고 2011년 9월 28일 국제연합 유엔 뉴스는 전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비트바터르스란트 대학교(University of the Witwatersrand)의 페리퍼(Audrey E Perrifor) 교수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North Carolina)의 자스판(Heather Jaspan) 교수는 젊은층의 높은 에이즈 감염률이 개방적이고 위험한 성생활 때문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고, 2011년 9월 18일자 남아프리카공화국 타임즈(Times)는 보도했다. 그동안 많은 서구의 기사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청년들의 성생활이 문란하고 이 때문에 에이즈 문제가 심각하다고 보도했다. 페티포와 자스판의 연구는 오히려 남아프리카공화국보다 미국의 젊은층이 성적 파트너의 수가 더 많고, 콘돔의 사용은 더 적으며, 더 어린 나이에 성관계를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페티포 교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젊은층은 위험한 성생활로 인한 에이즈에 감염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에이즈 문제에는 생물학적, 유전적 이유, 남아프리카공화국 지역의 바이러스와 관련된 이유, 환경적인 이유 등이 복잡하게 얽혀 성관계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세계 최대 에이즈 감염국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대부분의 에이즈 환자가 동성연애나 개방적인 성생활, 빈곤으로 인한 매매춘 때문에 감염되고 있는 아니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무엇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세계 최대 에이즈 감염국으로 만들었는지를 편향되지 않은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은 에이즈로 고통 받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보다는 모자감염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지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출처:  남아프리카공화국 데일리뉴스(Daily News)  (2011년 9월 20일)

“Little change in SA’s child mortality rate”

http://www.iol.co.za/lifestyle/family/kids/little-change-in-sa-s-child-mortality-rate-1.1141463

국제연합 유엔 뉴스(UN News Centre) (2011년 9월 28일)

“Commitment and funding key to eliminating HIV infections among children – UN”

http://www.un.org/apps/news/story.asp?NewsID=39868

남아프리카공화국 타임즈(Times) (2011년 9월 18일)

“High youth Aids rate ‘not result of risky sex’

http://www.timeslive.co.za/local/2011/09/18/high-youth-aids-rate-not-result-of-risky-sex 


잠비아에 대한 중국의 투자 혹은 착취

19Nov/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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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김광수


   중국은 2007년부터 현재까지 61억 달러가 넘는 돈을 잠비아(Republic of Zambia)에 투자하고 있고, 현재 잠비아에는 중국이 투자한 광산들과 중국 은행, 상점 등이 상당한 수에 이른다. 특히 구리가 풍부한 잠비아의 광산에 유입되는 중국의 자본은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2010년 두 명의 중국인 광산관리자가 형편없는 임금과 근무조건에 반발한 11명의 잠비아 광산 노동자를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을 비롯해서, 잠비아 노동자에 대한 중국의 횡포는 계속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심지어 중국인 노동자를 본국에서 데려와 고용하여 잠비아 현지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등, 잠비아의 노동법을 준수하지 않은 채 투자명목으로 착취를 일삼고 있는 상황이다.

   새로 선출된 잠비아의 사타(Michael C. Sata) 대통령은 중국을 비롯한 외국인 광산기업에 대해 세금을 더 높게 매기는 등, 강경책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중국의 지나친 자본 유입에 대해 반감을 표시한 바 있었다. 사타는 중국대사 저우 위소(Zhou Yuxiao)에게 잠비아가 은돌라 경기장과 루사카 병원을 건설하는 데 대해 중국의 지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중국의 투자는 반드시 잠비아에게 이익이 되어야 하며, 중국인들은 현지법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고 강하게 지적한 바 있다.

   위의 만평은 중국에 대한 강경책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는 잠비아의 새 대통령 사타의 위와 같은 발언과 함께 실린 것으로, 인권문제를 들고 진출하려는 서구국가들의 진출을 잠비아가 거부하고 중국하고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서구세계가 인권으로 대변되는 위의 만평은 지극히 서구적인 시각에서 그려졌다. 중국이 잠비아인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것을 풍자하고 싶었다면, 중국과 잠비아 두 나라의 상황만 가지고 그렸어야 한다. 아프리카는 과거 식민지의 아픔 등 때문에 유럽을 비롯한 백인국가들의 투자를 일정부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 인권에 대해 일방적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니며, 서방국가는 곧 인권이라는 식의 표현도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출처: RNW(Radio Netherlands Worldwide) (2011년 9월 27일) “Sata Tells Chinese Investors to Respect Labour Laws” http://allafrica.com/stories/201109270568.html

달라이 라마,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입국을 거부당하다

19Nov/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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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김광수


   티베트(Tibet)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Dalai-Lama ⅩⅣ, Tenzin Gyatso)에게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2009년 국제평화회의에 참여하려는 달라이 라마를 저지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두 번째 달라이 라마 입국 거부이다. 달라이 라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그의 절친한 친구인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의 10월 7일 80회 생일에 즈음한 기념 강연을 위해 투투평화재단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입국을 위해, 투투재단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와 접촉 하고 비자발급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끝내 거부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비자를 거부한 진짜 이유는 중국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분석이다. 중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대교역국이며 투자국가이다. 중국은 티베트의 독립 및 자치와 관련해서 티베트와 끊임없이 마찰과 갈등을 빚고 있고, 티베트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강력한 저지는 유혈사태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거부하고 비자를 발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원하지 않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 비자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만 빼고 모두 물어보라는 도사와, 답답해하는 달라이 라마가 그려진 이 만평은 현재 달라이 라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입국 거부 현상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 내에서는 공식적이고 정치적인 입국이 아닌 개인적인 일로 방문하는 달라이 라마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과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물론 국가의 경제적인 이익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인 일로 방문한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국가가 나서서 저지하는 것은 지나치게 중국 정부를 의식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눈치보기라고 여겨지며, 만약 정말 달라이 라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입국으로 인해 남아프리카공화국-중국 간 교역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외교력 문제라고 생각된다.


출처: 남아프리카공화국 타임즈(Times) (2011년 9월 22일)

http://www.timeslive.co.za/local/2011/06/13/zapiro-cartoons#11

진정한 지도자 왕가리 마다이를 잃은 아프리카(상)

19Nov/11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 연구교수 박정경


   지난 9월25일 일요일 밤(케냐 현지 시간), 200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왕가리 마다이 교수가 71세를 일기로 케냐 나이로비에서 타계했다. 평생 동안 환경 보호와 정치 개혁에 헌신했던 그녀의 죽음에 케냐는 물론, 아프리카 전체가 애도를 표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는 왕가리 교수가 ‘선견지명을 지닌 아프리카 여성’이자 ‘아프리카 대륙의 선도적 목소리’였다고 추모했고, 전(前) 유엔사무총장 코피 아난(Kofi Annan)은 그녀가 “용감한 지도자였으며, 아프리카인의 삶을 개선하는 데 헌신한 그녀의 일생은 젊은 세대에 귀감이 될 것이다”라며 그녀 생애의 의미를 되새겼다.

   왕가리 교수는 1940년 4월1일 케냐 중부 고원 지역 녜리(Nyeri)의 작은 마을 이히테(Ihithe)에서 태어났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케냐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백인 농장주 밑에서 일하는 평범한 농부였다. 그녀는 8세 때 이히테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서구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11세 때 가톨릭 선교 단체가 운영하는 성(聖)세실리아중급초등학교(St. Cecilia’s Intermediate Primary School)로 전학하게 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녀는 ‘마리 조세핀’(Mary Josephine)이라는 세례명을 받기도 했다. 그녀의 학창시절, 즉 1950년을 전후하여 케냐 중부 고원 지역에서는 백인 농장주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기쿠유(Gikuyu) 집단을 중심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마우마우(Mau Mau)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그녀의 가족은 영국 식민행정부의 긴급사태 발효로 고향을 떠나는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기숙학교에 있던 그녀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던 왕가리 교수는 우수한 성적으로 리무루(Limuru)의 로레토고등학교(Loreto High School)에 입학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우간다의 동아프리카대학교(University of East Africa) 진학을 준비했다. 이 시기에 독립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케냐의 정치인들은 우수한 젊은이들을 선진국에 유학 보내 국가 건설의 초석을 마련할 인재를 육성하고자 했다. 1960년 당시 미국의 상원위원이었던 케네디(John F. Kennedy)의 지원으로 300여 명의 케냐 젊은이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는데, 왕가리 교수도 이들 중 일원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녀는 성(聖)스콜라스티카대학(St. Scholastica College)과 피츠버그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h)에서 생물학으로 각각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 잠시 케냐에 귀국했다가 다시 독일로 유학을 떠난 왕가리 교수는 기센대학교(University of Giessen)와 뮌헨대학교(University of Munich)에서 조직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 왕가리 교수는 ‘마리 조세핀’이라는 기독교식 세례명을 버리고 ‘왕가리 무타’(Wangari Muta)라는 기쿠유 이름을 사용했다. 이는 식민주의의 잔재를 제거하고,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그녀 의지의 표현이었다. 1969년에 나이로비대학교(University of Nairobi)의 강사로 임용되어 고국에 돌아온 왕가리 교수는 1971년에 동대학교에서 해부학 박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동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박사가 되었고, 1977년에는 수의학과 교수에 임명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