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지도자 왕가리 마다이를 잃은 아프리카(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 연구교수 박정경


   지난 9월25일 일요일 밤(케냐 현지 시간), 200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왕가리 마다이 교수가 71세를 일기로 케냐 나이로비에서 타계했다. 평생 동안 환경 보호와 정치 개혁에 헌신했던 그녀의 죽음에 케냐는 물론, 아프리카 전체가 애도를 표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는 왕가리 교수가 ‘선견지명을 지닌 아프리카 여성’이자 ‘아프리카 대륙의 선도적 목소리’였다고 추모했고, 전(前) 유엔사무총장 코피 아난(Kofi Annan)은 그녀가 “용감한 지도자였으며, 아프리카인의 삶을 개선하는 데 헌신한 그녀의 일생은 젊은 세대에 귀감이 될 것이다”라며 그녀 생애의 의미를 되새겼다.

   왕가리 교수는 1940년 4월1일 케냐 중부 고원 지역 녜리(Nyeri)의 작은 마을 이히테(Ihithe)에서 태어났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케냐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백인 농장주 밑에서 일하는 평범한 농부였다. 그녀는 8세 때 이히테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서구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11세 때 가톨릭 선교 단체가 운영하는 성(聖)세실리아중급초등학교(St. Cecilia’s Intermediate Primary School)로 전학하게 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녀는 ‘마리 조세핀’(Mary Josephine)이라는 세례명을 받기도 했다. 그녀의 학창시절, 즉 1950년을 전후하여 케냐 중부 고원 지역에서는 백인 농장주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기쿠유(Gikuyu) 집단을 중심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마우마우(Mau Mau)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그녀의 가족은 영국 식민행정부의 긴급사태 발효로 고향을 떠나는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기숙학교에 있던 그녀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던 왕가리 교수는 우수한 성적으로 리무루(Limuru)의 로레토고등학교(Loreto High School)에 입학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우간다의 동아프리카대학교(University of East Africa) 진학을 준비했다. 이 시기에 독립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케냐의 정치인들은 우수한 젊은이들을 선진국에 유학 보내 국가 건설의 초석을 마련할 인재를 육성하고자 했다. 1960년 당시 미국의 상원위원이었던 케네디(John F. Kennedy)의 지원으로 300여 명의 케냐 젊은이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는데, 왕가리 교수도 이들 중 일원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녀는 성(聖)스콜라스티카대학(St. Scholastica College)과 피츠버그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h)에서 생물학으로 각각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 잠시 케냐에 귀국했다가 다시 독일로 유학을 떠난 왕가리 교수는 기센대학교(University of Giessen)와 뮌헨대학교(University of Munich)에서 조직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 왕가리 교수는 ‘마리 조세핀’이라는 기독교식 세례명을 버리고 ‘왕가리 무타’(Wangari Muta)라는 기쿠유 이름을 사용했다. 이는 식민주의의 잔재를 제거하고,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그녀 의지의 표현이었다. 1969년에 나이로비대학교(University of Nairobi)의 강사로 임용되어 고국에 돌아온 왕가리 교수는 1971년에 동대학교에서 해부학 박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동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박사가 되었고, 1977년에는 수의학과 교수에 임명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