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디부아르 사태와 프랑스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이한규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적 혼란 및 정치위기는 1993년 코트디부아르 국부 펠릭스 후푸에-브와니(Félix Houphouet-Boigny)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시작되었다. 2010년 10월 31일 대통령 선거에서 45.9%를 차지한 당시 현직 대통령 로란 바그보(Laurent Gbagbo)는 차기 대선 후보자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가 54.9%를 차지하며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정권을 이양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권력공백은 당시 국회의장 앙리 코난 베디에(Henri Konan Bédié)와 총리 와타라 간의 권력투쟁으로 이어졌다. 헌법상으로는 국회의장이 대통령을 수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를 인정치 않은 총리는 북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베디에 정부에 대항하면서 코트디부아르 내전은 18년간 계속되었다. 특히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어받은 베디에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Ivoirité(이부와리떼)를 통해서 장기집권의 틀을 형성하였지만 1999년 쿠데타로 실권한 후 바그보가 2000년부터 코트디부아르를 통치하는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코트디부아르 성(性)이라고 하는 이부와리떼를 통해 북부지역의 경쟁자인 와타라를 배제하고 장기집권하려는 정책이 두 정치세력간의 내전으로 확산되었다. 합법적인 통치자가 된 와타라 대통령은 북부지역에 절대적인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행정부의 중심인 수도 아비장에서는 선거에서 패배한 바그보가 여전히 정부의 주요기관들을 점거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는 바그보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권력 이양을 거부하면서 내전상태가 더 악화되었다. 하지만 지난달 11일 프랑스와 유엔 등 국제사회의 군사개입으로 바그보 권력의 욕망은 끝이 나고, 40여년간의 독재정치는 와타라 대통령 취임으로 그 막을 내렸다.

   특히 이번 코트디부아르 내전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미온적이고 빠르지 못한 개입은 리비아사태에 대한 서방국들의 조치와 대조된다. 반면 리비아 사태에서처럼 프랑스는 서방국가 중에 코트디부아르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2002년에 프랑스 정부는 반정부 세력의 봉기로 바그보 정권이 위험에 처하자 군사지원을 단행하기도 하였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바그보 정권의 축출에 앞장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 민생안정과 핵심 공공서비스 복구를 위해 5억 유로(6억 9200만 달러)와 1.8억 유로를 특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18년 동안 지속되었던 남북 간의 정치적 대립은 와타라 대통령의 취임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동안 정치적 대립과 유혈사태의 해결은 현 정부가 어떤 톨레랑스(tolérance)를 펼칠 것인가에 달려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국내문제이기도 하지만 아프리카를 둘러싼 서방국가들의 경쟁의 틀에서 아프리카의 국제정치적 시각을 다시 재고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