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이후 말리 중부 지역에서 심화됐던 풀라니족 유목민의 폭동이 점차 남부 지역으로 확대되며 위협을 키우고 있다. 아프리카의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기실 있어 왔다. 하지만 테러 단체의 급증과 기후 변화, 사헬 지대 내의 무기 거래 활성화와 같은 문제들과 얽히며 사태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초기 풀리니인이 보여준 거친 행동은 자민족의 이익과 보호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들의 상황이 서아프리카와 중부 아프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 단체에 의해 악용되면서 더욱 악화되고 있다.
풀라니족은 대부분이 무슬림인 유목 민족으로, 총 인구는 약 3천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나이지리아, 기니, 세네갈, 카메룬,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코트디부아르, 모리타니아, 감비아, 기니비사우 등 주로 서아프리카와 중부 아프리카에 걸쳐 넓게 분포돼 있다.
나이지리아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풀라니인의 경우 나이지리아 내 북쪽 지역에서 중부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며 북쪽의 무슬림과 남쪽의 기독교도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풀라니인이 이곳으로 내려온 것은 기후 변화 문제와 과도한 방목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최근 8년 전부터 북동부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슬람 무장 단체 보코하람의 대량 학살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랑 생활을 하는 무슬림 유목민과 정착해 살아오던 기독교인 농경민 사이에서 땅과 물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 또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다. 무슬림과 기독교도 간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해오던 중부 지역에서 종교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이래 조스(Jos) 시에서 수차례의 폭탄 테러가 일어나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에서도 무슬림에 디한 반감이 커지면서 이것이 북쪽에서 내려온 풀라니인에게로 향하게 된 것이다. 보코하람을 피해 내려온 풀라니인에게 보코하람과 공모했다는 비난의 화살이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헬 지대에서는 “풀라니족 테러리스트는 없다. 다만 성난 풀라니족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종종 회자된다.
그러나 풀라니인은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민족이 절대 아니다. 물론 유목민과 농경민 간의 토지 확보를 둘러싼 갈등은 있어 왔지만, 그것은 생존의 문제일 뿐, 풀라니인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다. 나이지리아의 풀라니인이 대규모로 이주를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엽이다. 그들은 모두 무슬림으로서 이 당시에 하우사 칠 왕국은 상류층을 중심으로는 이슬람을 이미 신봉하고 있었으나,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토착 신앙인 보리(bori) 무속 신앙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다. 상류층 역시 표면적으로는 이슬람을 신봉한다고는 하나, 수 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자신들의 토착 신앙에서 갑자기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에 풀라니 출신의 이슬람 학자인 우스만 단 포디오는 이교도적 풍습에서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하우사 왕들도 이교도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왕국들을 상대로 성전을 일으킨다. 1804~1810년에 걸쳐 이루어진 이슬람 성전은 결국 하우사 칠 왕국을 모두 멸망시키고, 우스만은 마침내 오늘날 북서 나이지리아의 소코토(Sokoto)에 하우사-풀라니(Hausa-Fulani) 제국을 건설하고 초대 칼리프로 등극했다. 그는 왕국의 통합과 이슬람 국가 건설을 통해 종교적, 정치적 변화 뿐 아니라, 언어적 동질성을 부여하기 위해 하우사인으로 하여금 기존의 언어와 문화, 관습, 전통 등은 유지하게 하는 온건한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이 하우사-풀라니인으로서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결국 최근의 지하디스트 무장 단체들로 인해, 갈 곳 없는 풀라니인만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