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를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자, 만델라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이한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전 대통령 만델라는 오랜 투병 끝에 눈을 감았다. 화합과 자유, 그리고 톨레랑스(tolérance: 프랑스 어)를 위해 일생을 바친 그는 15일 국장(國葬)으로 남아공 국민과 그를 사랑하는 지구촌 사람들로부터 영원한 마지막 작별을 하였다. 몇 년 전 영국의 한 여론 조사 기관에서 ‘만약에 세계정부가 들어선다면, 초대 대통령으로 누가 좋겠느냐’는 질문에 대다수가 만델라를 지명했다. 세계정부 대통령으로도 부끄러움이 없는 만델라의 영결식에는 유래 없이 90여개 국가의 정상들이 참여하여 만델라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만델라가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관심을 받은 것은 그가 남보다 뛰어난 천재이거나 유명한 배우처럼 잘 생겨서도 아니었다.

   만델라는 1918년 트란스케이 주(州)의 음베조라는 작은 마을에서 템부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만델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대추장 욘긴타바의 양자로 입양되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만델라는 ‘검은 영국인’으로서 꿈을 키우며, 자신의 꿈인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률 공부에만 매진하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만델라는 대학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파르트헤이트(백인의 인종차별)에 그리 민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점차 백인에 의한 인종차별을 경험하게 되고 26살에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했다. 하지만 만델라의 투쟁은 그가 46살이던 1964년 국가 전복 혐의로 종신형을 받고, 악명 높은 로벤 섬에 수감되면서 마감되었다.

   1990년 2월 백인 신정부는 만델라를 석방하였고, 1994년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당선은 또 다른 힘겨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남아공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흑인은 15%를 차지하는 소수의 백인으로부터 더 이상 차별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백인과 같은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350년의 인종차별에 대한 흑인들의 보상 요구로 또 다른 아파르트헤이트, 즉 흑인에 의한 백인에 대한 차별과 앙갚음이 남아공 사회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시키는 데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남아공노조연맹은 초대 대통령 만델라에게 ‘先분배, 後성장’의 즉각적인 현실화를 압박하기도 하였다. 물론 만델라는 초기 정부에 ‘先분배, 後성장’ 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래가 있는 남아공을 위해서 당시 인기가 없었던, 아니 만델라를 정치적 위기로 몰아갈 수 있었던 ‘先성장, 後분배’정책을 통해서 더불어 살아가는 남아공 사회에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다. 이것이 남아공 사회가 흑인 다수를 위한 사회가 아닌 나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진정한 인간적인 남아공 사회를 만들려 했던 것이고, 27년 동안 감옥 생활에서 만델라가 생각했던 그런 사회를 현실화시키려 했던 것이 아닌가? 만델라는 대통령 당선 축하 파티에서 “더 이상 백인의 독재도, 흑인의 독재도 없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만델라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일깨워 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통치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다수결에 의해서 소수로 전락한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소외되거나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다수의 의지에 휩쓸리는 민주주의의 횡포는 남과의 차이를 인정해 주는 톨레랑스의 정신마저도 배척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