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 아비에이 문제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 연구교수 금상문


   남수단은 2011년 7월 9일, 수단의 국민 투표에서 98.83%의 찬성으로 남수단의 독립이 확정됐다. 남수단의 독립국이름은 남수단공화국이다. 그러나 남수단과 북수단 양측은 첨예하게 마찰을 빚고 있는 실정이다. 즉 남북 수단 분리에 있어 양측의 가장 큰 쟁점은 2100km를 넘는 국경 문제와 아비에이 귀속 문제가 그것이다. 아비에이 지역은 막대한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의 석유채굴이 1990대에 수단정부가 투자를 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2003년에 이르면서 아비에이 지역에서의 석유생산은 수단 석유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지역으로부터 석유 파이프라인은 홍해에 위치한 수단 항에 까지 연결되어 있다. 아비에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약 5만 명에서 5만 5천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비에이는 딘카족의 지류인 은고크 딘카(Ngok Dinka)족과 메시나(Messina)족이 방목을 하면서 거주하였다. 1905년 메시나족은 은고크 딘카족의 영토에 침입한 이후, 영국 식민지 정부는 9개 온고크 딘카족의 지배지를 단일 코르도판(Kordofan)으로 재구획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은고크 딘카와 메시나는 1956년부터 1972년까지 지속된 제1차 수단내전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1965년 미세리아 마을에서 운고크 딘카 부족원 약 70명이 수단정부의 지원을 받는 메시나에 의해 학살을 당하였다. 1972년 아디스아바바에서 아비에이 거주 양측은 북수단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또는 남쪽 자치정부에 남아있을 것인가를 투표로 결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이 투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메시나 부족은 이후에도 계속 은고크 딘카를 공격하였다.

   남수단이 2011년 주민투표로 독립을 확정짓자 북수단은 아비에이에 대한 우선권을 인정받고자 북수단은 아비에이에 탱크와 함께 군대를 주둔시켰다. 북수단군이 아비에이를 점거한 결과 아비에이 1만5000명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다. 5월 25일에는 이 지역을 통과하는 유엔 소속 헬리콥터도 북수단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아비에이 귀속을 원하는 남수단으로서는 난감한 지경에 빠졌고, 더욱 남수단과 북수단 간의 갈등관계는 더욱 증폭되었다. 이전에도 1983년 남부수단에선 존 가랑(John Garang)이 이끄는 수단인민해방군(Sudan People’s Liberation Army: SPLA)이 창설되어 북수단 정부에 대항하여 싸운 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남북 수단 간에 2002년 마차코스 프로토콜(Machakos Protocol), 국제적인 조정 등이 있었으나 남쪽 SPLA와 북쪽 정부군 간의 무력투쟁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갈등관계를 해결하고자 유엔은 북수단 정부에 철군을 요청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마르 알바시르 북수단 대통령은 “아비에이는 수단 영토”라며 거부했다. 유엔은 2011년 5월 26일 “수단 정부가 아비에이를 점령한 뒤 이곳에 북수단 쪽 유목민을 이주시켜 영구 병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아프리카 연합(AU)도 아비에이 아프리카연합군을 파견하면서 아비에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에디오피아는 2011년 5월 30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남북 수단 대표를 모이게 하였고, 남북 수단 간 안보 협력 기구를 만들어 상호 안정적인 관계를 보장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남북수단이 서명하게 만들었다. 남북 수단 간에 합의된 협정은 공동 국경 지역(Common Border Zone)의 설치, 공동 국경지역의 비무장, 님북 공동의 관리와 순찰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협정은 아비에이 지역에 대한 합의가 아니기 때문에 아비에이 지역에 대한 분쟁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출처:

http://aljazeera.net/NR/exeres/67DFEFFD-934B-4055-9506-72B7C1DCF5F6.html

http://en.wikipedia.org/wiki/Abyei

동아일보( 2011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