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여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에서 대규모 노동 이주가 시작된 것은 서구 자본주의 경제 체계가 이식되면서부터였다. 1867년 오렌지 자유 주(Orange Free State)에서 다이아몬드가, 그리고 1886년 트란스발(Transvaal)에서 금이 발견된 이후, 상당수의 흑인은 가족을 고향에 남겨 두고 도시 지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광산 부문뿐만 아니라 2차 산업과 상업농 부문의 성장은 값싼 노동력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도시화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농촌 지역 출신 노동자들 중 대다수는 실업이나 퇴직에 대비하기 위해서 도시 지역에 영구 정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노동 이주는 ‘순환적 이주 패턴’의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이주 노동 체계는 지난 150년 동안 남아공 경제 발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였다. 그간 남아공의 노동 이주는 ‘지배’와 ‘착취’의 성격을 띠어 온 게 사실이다. 1994년 남아공은 백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식민지 체제 하에서 구조화된 노동 이주 체계는 여전히 강력한 경제적 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남아공 농촌 주민들의 노동 이주는 통과의례, 아비투스(habitus), 생존 전략, 보험 등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노동 이주를 통해서 가족 경제와 지역 공동체의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한다. 그러나 노동 이주는 부정적 측면도 지니고 있다. 장기간의 노동 이주는 남편이나 부인의 부정(不貞)을 부채질하고, 자녀 양육 과정에서 적잖은 문제를 야기하며, 부모와 자식 간의 정서적 유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공동체 수준에서 볼 때 송금에 대한 의존은 주민들을 타성에 젖도록 하고, 청․장년층의 이출은 지역 개발에 필요한 추동력의 상실을 초래한다. 또한 노동 이주로 인해 개별 가족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주민들 간의 불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빈곤과 애정 결핍에 시달리는 아동들의 문제는 지역 공동체 수준에서의 논의와 각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 노동 이주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빈곤의 사슬을 끊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들에게 노동 이주는 ‘생존 전략’이자 자신들의 삶을 옭아매는 ‘올가미’이기도 하다. 즉, 남아공의 노동 이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양면성은 남아공의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가 어떤 식으로 해결되느냐에 따라서 그 빛깔을 달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