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한국(HK)

HK20140619

단계별 공통 연구 주제

오늘날 아프리카의 사회, 문화상은 전통성과 근대성, 지역화와 세계화가 공존하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아프리카라는 공간 안팎의 사람들이 이주와 교차를 한 결과이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인종적, 문화적 혼성 현상이 일어났다. 반투인의 대이주, 사하라 종횡단 무역, 이슬람과 기독교의 유입과 확산, 유럽의 식민 지배 등은 이런 혼성 문화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세계화로 인해 국경과 대륙을 넘나드는 인적, 물적 교류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게 되었고, 그 결과 국가 간의 경계가 지니는 의미가 퇴색되어갔다.

본 연구의 궁극적 목적은 아프리카 사회문화의 혼성을 주도해 온 아프리카인의 문화적 ‘원리와 힘’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프리카 문화의 속성을 ‘과정’(process)으로 전제하고 전체 사업을 3단계로 나눠 진행하고자 한다. 각 단계의 연구 주제어는 ‘경계와 지속’, ‘교차와 혼성’, ‘소멸 혹은 재구성’으로 설정한다. 이는 사업의 단계별 진행을 구분 짓기 위해 정의한 것으로, 단계별 현상은 통시적이며 공시적인 현상임을 밝힌다. 따라서 단계별 연구 주제는 아프리카 대륙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어라고 말할 수 있다.

단계별 공통 주제어

본 연구에서 설정한 세 단계 공통 주제어들은 각기 독립적임과 동시에 상호 관련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통시적으로 형성된 문화상은 다층적 구조를 띠기 때문이다. 이들 공통 주제어는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람이 빚어내는 아프리카 문화의 역동성을 문화적 혼성이라는 현상을 통해 탐구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아프리카의 문화 혼성을 이끌어가는 아프리카인의 주체성과 문화적 원동력을 규명하는 것이 본 사업의 목표이다.

단계별 주제어의 개념 정의는 다음과 같다.

1단계: 경계와 지속

‘경계’(boundary)는 하나의 구조가 다른 구조와 구별되는 공간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경계는 고유성과 배타성을 지닌다. 민족성, 종교, 언어 등은 경계를 형성하는 근원적(Primordial) 요인으로 꼽힌다. ‘지속’(continuity)은 구조와 구조가 상호 교차하는 과정에서 구성요소가 소멸되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경계의 지속은 경계가 지닌 속성의 변화보다는 유지를 강조하는 관점이다. ‘경계’와 ‘지속’이라는 개념은 아프리카 문화의 정체성(identity)을 규명하는 데 상당히 유용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 외부 사회와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사회에서 여전히 ‘아프리카적’이라고 정의되는 여러 문화적 속성은 경계와 지속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분석적 혹은 상대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계의 형성과 지속은 기본적으로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둘째,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거나 정적인(static) 사회구조나 문화란 있을 수 없다. 셋째, 모든 문화적 정체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느 정도의 변화와 수용, 재구조화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2단계: 교차와 혼성

‘교차’(crossing)는 상이한 체계를 가진 구조들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물리적 만남이다. ‘혼성’(hybridity)은 교차를 통해 특정 구조의 사회, 문화적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다른 구조적 특징들과 섞이는 것을 의미한다. 교차와 혼성의 공통된 특성은 ‘탈 경계’에 있다. 인간의 문화사는 교차와 혼성의 역사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역사를 통해 다양한 층위의 구조들 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교차와 그에 따른 혼성이 발생해 왔다. 상이한 언어 사이의 교차, 상이한 생산양식 사이의 교차에 따른 혼성 등은 아프리카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재적 문화 현상이다. 교차와 혼성이라는 개념은 다층적인 사회,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즉, 이 개념은 아프리카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과정’이라는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3단계: 소멸 혹은 재구성

‘소멸’(extinction)은 장기간의 교차와 혼성 과정을 통해 구조의 특징들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재구성’(restructuring)이란 소멸 대신 구조적 특성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재배열 또는 재조직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약한 구조가 지배적인 구조와 비대칭적 만남을 갖게 되면, 지배 구조에 통합 흡수되면서 구조 자체가 소멸되기도 한다. 단적인 예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소수 언어의 소멸이다. 아프리카에서 사용되는 거대 언어, 예를 들어, 영어와 불어, 스와힐리어와 하우사어 등은 주변의 소수 언어 사용자를 흡수하면서 소수 언어를 소멸시킨다. 다른 한편, 상대적으로 대등하거나 저항이 강한 구조의 경우 외부의 구조와 충돌하면서 새로운 구조적 특성을 갖추기도 한다. 아프리카의 대도시에서 발견되는 언어의 크레올화(creolization)는 재구성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케냐의 쉥(Sheng)은 진취적 성향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보수적인 기성세대의 구조적 지배력에 저항하기 위해 스와힐리어와 영어를 재구성하여 만들어 낸 언어 현상이다. 이처럼 ‘소멸’ 혹은 ‘재구성’이라는 개념은 아프리카 여러 사회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이 연구 사업의 주제가 던져주는 흐름– 경계와 교차, 혼성과 재구성– 은 아프리카인을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도 로컬리티(locality)를 고수하면서 문화 변동을 주도하는 능동적, 주체적 존재로 인식하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HK20140619-002

스와힐리–나일/북동아프로아시아 권역, 하우사 – 볼타·콩고 권역, 줄루 – 남부반투/코이산 권역, 그리고 베르베르–사헬(만데/대서양) 권역은 동질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여기에는 각 권역의 지리 및 지형적 환경과 더불어 과거 아프리카 대륙에서 내·외부적으로 일어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1) 반투 이동(BC 1500~AD 1000), (2) 기독교 문화의 유입(AD 1세기~), (3) 이슬람 문화의 전파(AD 7세기~).

2,500여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반투 이동이 과거 사하라 사막 이남의 중·남부 및 동부 지역의 문화 지형을 대거 탈바꿈시킨 내부 요인이었다면, 기독교 및 이슬람 문화의 확산은 북부 및 서부 아프리카를 비롯한 대륙 전체의 문화 지형을 지속적으로 변화시켜온 강력한 외부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세 사건의 전개 과정은 이주, 농경의 확산, 접촉에 따른 문화 수용과 동화, 사하라 종횡단 교역, 고대 왕국의 흥망성쇠, 노예무역, 식민 지배, 독립 및 신생국의 탄생 등과 같이 아프리카의 과거와 현재를 직·간접적으로 구성하고 규정해 온 과정이기도 한다.

또한 이 요인들은 본 사업에서 설정한 네 권역의 역사 및 문화와 서로 각기 다른 양상으로 교차하는 접점임과 동시에 이질성의 원인이 된다. 예를 들어 반투 이동은 베르베르-사헬 권역을 제외한 나머지 세 권역이 서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 권역들에 분포하는 언어들 대부분이 동일한 나이저-콩고 어족에 속한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문화의 확산 지역도 이슬람이 우세한 동부의 해안 지역과 토착 종교가 만연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위의 세 권역과 대부분 일치한다. 반면, 이슬람 문화는 동부의 스와힐리-나일/북동 아프로아시아 권역을 연결한다. 이 지역의 언어들 역시 스와힐리어를 비롯한 일부 반투어나 나일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동일한 아프로아시아어족에 속한다.

① 스와힐리-나일/북동아프로아시아 권역

스와힐리 문화는 토착 아프리카인의 생활 터전에 아랍인과 페르시아인(후에 인도인, 유럽인, 중국인) 등에 의해 유입된 문화가 뒤섞여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도시 크레올 문화이다. 이 지역은 현재 사하라 이남 지역의 최대 교통어인 스와힐리어를 바탕으로, 대륙 내에서 가장 거대한 언어·문화권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스와힐리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이 문화가 현재는 소수에 불과한 토착 스와힐리인의 전유 문화가 아니라 아랍·페르시아 문화, 인도 문화, 반투 문화, 나일·쿠쉬 문화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상이한 문화들을 아우르는 혼성 문화라는 점이다. 한편, 또 다른 하위 권역인 나일/북동아프로아시아 권역은 스와힐리 문화권의 북쪽에 위치한 현재의 에티오피아를 주 거점으로 하고 있다. 이 문화권은 에티오피아의 최대 언어인 암하라어와 이를 표기하는 교유 문자를 바탕으로 유서 깊은 문화를 형성해 온 사하라 이남의 최대 셈어 문화권이다. 또한 오로모, 소말리 등과 같은 거대한 쿠쉬 언어·문화도 이 하위 권역에 포함된다.

스와힐리-나일/북동아프로아시아 권역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국가들로는 케냐, 에티오피아, 수단, 콩고민주공화국(동부), 우간다, 탄자니아, 소말리아, 르완다, 부룬디 등이 있다. 본 사업에서는 케냐, 에티오피아 등을 우선 연구대상 국가로 하되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수단, 탄자니아 등 다른 주요 국가들에까지 연구를 점차 확대시켜 나가고자 한다.

② 하우사-볼타·콩고 권역

하우사인은 이미 10세기 무렵부터 현재의 하우사 중심 지역인 북부 나이지리아와 남부 니제르 등지에 여러 도시 국가들을 건설하였으며, 12세기부터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 중 하나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오랜 기간 현재의 리비아, 세네갈, 코트디브와르, 수단,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심지어 콩고 지역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곳곳에서 중·장거리 교역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하우사인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주변의 주요 종족들인 풀라니, 카누리, 만데, 송하이 등과 문화 교류를 함으로써, 이슬람의 전파와 더불어 이 지역의 문화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편, 볼타·콩고 하위 권역은 대서양의 기니만 연안에서 콩고 분지까지 이르는 열대 우림 지역의 다양한 문화들을 포함하며, 대륙 내에서 언어가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문화들로는 정주 지역의 생태적 환경에 따라 농경, 어업, 목축 등 다양한 생산양식을 보이는 요루바, 이보, 풀라니, 이조, 에도, 티브, 아칸 모씨, 뻬, 크루 문화 등을 들 수 있다.

하우사-볼타·콩고 권역에는 나이지리아, 카메룬, 가나, 코트디브와르, 라이베리아, 베냉, 토고, 부르키나 파소, 니제르 등이 포함되어 있다. 본 사업에서는 나이지리아와 가나에 연구 중점을 두되, 카메룬, 코트 디부와르 등 이들과 인접한 주요 국가들에도 연구 관심을 넓혀 나갈 계획이다.

③ 줄루-남부반투/코이산 권역

이 권역은 줄루어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반투 언어·문화와 언어 계통이 완전히 다른 코이산 언어·문화로 구성된다. 남부반투 언어·문화는 다시 줄루, 코사, 은데벨레 등을 포함하는 응구나 언어·문화와 이 외의 주력 반투 문화인 소토, 츠와나, 쇼나 언어·문화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 코이산 문화는 농경·목축의 생산방식을 바탕으로 한 코이 계열과 수렵·채집의 생산방식을 유지해 온 산 계열의 종족 문화를 합친 것인데, 흡착음(clicks)이라는 언어적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문화 간의 언어-종족적 계통 관계가 아직 명확히 규명되어 있지는 않다. 이들은 응구나 문화가 남부 아프리카로 유입·확산되기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그 후 현재의 주 거주 지역인 남서 아프리카 지역으로 밀려나 살게 되었다. 남부반투 문화와 코이산 문화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접촉해 왔다는 사실은 다른 중·동부 지역의 반투어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코이산어 특유의 흡착음들이 유독 이 지역의 반투어들에서 나타난다는 데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이 권역은 서로 이질적인 두 토착 문화의 접촉뿐만 아니라 외부인, 특히 유럽인과의 접촉으로 인하여 정치·경제적 혼종성이 타 권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나고 있다.

이 권역은 현재 본 사업의 우선 연구대상국인 남아공과 보츠와나를 비롯하여 짐바브웨, 앙골라, 모잠비크, 나미비아, 잠비아, 말라위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차후 앙골라, 잠비아 등과 같이 이 권역의 또 다른 주요 국가들에도 연구 영역을 순차적으로 확대하고자 한다.

④ 베르베르-사헬(만데/대서양) 권역

지중해를 끼고 근동 및 유럽과 인접한 북아프리카는 그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외침을 받아 왔다. 기원전 페니키아인을 필두로 로마인, 아랍인, 유럽인의 정복과 정착이 반복되면서 토착 문화에 이슬람은 물론 유럽의 영향까지 가미된, 이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지역의 이슬람화는 이미 7세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사헬 지역은 사하라 사막이라는 지형적 장벽과 강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베르베르인과 토착민의 반발, 그리고 당시 그 지역의 여러 정치 역학적 상황 등으로 인하여 15세기에야 비로소 그 문화가 널리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베르베르인은 이슬람 문화를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문화적 특성과 종교적 관행을 부분적으로나마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슬람과 토착 문화의 결합 형태는 특히 종교적 실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코란과 순나(Sunnah)에서 제시하고 있지 않은 종교적 관행인 비드아(bid ‘ah)가 다른 이슬람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뚜렷이 나타나며, 특히 성자숭배 사상, 바라카(barakah)에 대한 믿음은 모로코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에 널리 퍼져 있다.

베르베르인은 사하라 사막을 관통하는 원거리 종단 무역의 주역으로서, 때론 알모라비드와 같은 정복자로서 아랍인, 하우사인과 더불이 북아프리카와 사헬 지역 간의 문물 교류를 오랫동안 이끌어 왔으며, 이를 통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역사 및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이들과 주로 교역을 하던 사헬 지역 사람들은 소닝케, 수수, 월로프, 풀라니 등 주로 만데어와 대서양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금, 소금, 상아 등의 무역 거래와 이슬람 문화의 도입을 통해 가나, 말리 등과 같이 대규모의 강력한 왕국들을 서부 사헬 지역에 건설하고 오랜 기간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 권역의 우선 연구대상 국가는 베르베르인이 주축을 이루는 모로코와 만데어 및 대서양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주 구성원인 세네갈이다. 그 밖에 본 사업에서는 국내에서 아직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인근의 모리타니와 말리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